다테 나리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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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테 나리무라는 1775년에 태어나 1796년에 사망한 센다이 번의 다이묘이다. 그는 다테 시게무라의 서자로 태어나 형의 사망으로 가문을 상속받았으며, 1787년 원복 후 다테 나리무라로 개명했다. 1790년 아버지의 은퇴로 다이묘가 되었으며, 1793년 고카쿠 천황의 사촌과 결혼했다. 그러나 1796년 아내의 사망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후, 23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당시 그의 장남은 유아였고, 차남은 뱃속에 있어 그의 죽음은 비밀리에 처리되었으며, 장남이 상속받았다. 그는 무예보다는 시문을 즐겼으며, 사쿠나미 온천 개발을 허가하는 등 교양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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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 나리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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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다테 나리무라 |
원어 이름 | 伊達斉村 |
로마자 표기 | Date Narimura |
출생일 | 1775년 1월 6일 |
사망일 | 1796년 8월 29일 |
사망 장소 | 센다이, 일본 |
국적 | 일본 |
어린 시절 이름 | 시키사부로 (式三郎) |
통칭 | 시키사부로 (式三郎) → 소지ro (総次郎) |
호 | 게이잔 (桂山) |
시호 | 에이케이인덴 게이잔란에이 다이코지 (永慶院殿桂山蘭榮大居士) |
관위 | 종사위하 시종, 미마사카노카미, 무쓰노카미, 좌근위권소장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쿠가와 이에나리 |
센다이 번주 | |
재임 시작 | 1790년 |
재임 종료 | 1796년 |
선대 번주 | 다테 시게무라 |
후대 번주 | 다테 지카무네 |
가족 | |
배우자 | 노부코,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딸 |
아버지 | 다테 시게무라 |
어머니 | 키타야마 미테쓰(후지쿠라)의 딸, 쇼소인 (正操院) |
형제자매 | 소사부로, 나리무라, 센사부로, 순히메, 미쓰히메, 이쿠히메, 쇼히메, 요히메 |
정실 | 신쇼인 |
측실 | 신코인 |
자녀 | 지카무네, 나리무네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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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다테 시게무라의 차남으로 태어나 처음에는 '''祝村|토키무라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안영(安永) 3년(1775년) 출생으로, 덴메이(天明) 3년(1783년) 형의 요절로 후계자가 되었다. 덴메이 7년(1787년) 성인식을 치르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이름 한 글자를 받아 '''斉村|나리무라일본어'''로 개명하며 관직을 받았다.
간세이(寛政) 2년(1790년) 아버지 시게무라의 은퇴로 가독(家督)을 상속받아 센다이 번의 8대 다이묘가 되었으며, 이후 관직이 변경되었다. 간세이 5년(1793년)에는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딸과 혼인했다.
간세이 8년(1796년)은 나리무라에게 불운이 겹친 해였다. 정실 부인이 장남 스미무네를 낳은 후 산후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시게무라도 에도에서 사망했다. 나리무라 본인도 아버지의 장례 후 센다이로 돌아오던 중 병을 얻어, 같은 해 7월 27일(양력 8월 29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센다이성에서 병사했다.
사망 당시 장남 스미무네는 갓난아기였고 차남 다테 나리무네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센다이 번에서는 후계 문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나리무라의 사망 사실을 잠시 숨기고 장남의 말기양자 상속 절차를 진행했다.
2. 1. 초기 생애
伊達 斉村|다테 나리무라일본어는 센다이 번의 7대 번주 다테 시게무라( 伊達重村일본어 )의 차남으로, 안에이(安永) 3년 12월 5일(1775년 1월 6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측실인 正操院|쇼소인일본어( 喜多山美哲|기타야마 미테츠일본어의 딸)이다. 아명은 式三郎|시키사부로일본어, 후에 総次郎|쇼지로일본어를 거쳐 '''祝村|토키무라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덴메이(天明) 3년(1783년), 형이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되었고, 아버지의 정실인 観心院|칸신인일본어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수역(守役)은 古田良智|후루타 요시토모일본어, 부역(付役)은 平賀義雅|히라가 요시마사일본어가 맡았다.덴메이 7년(1787년)에 성인식(元服)을 치르고,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나리( 徳川家斉일본어 )로부터 이름의 한 글자(偏諱, 헨기)인 '나리(斉)'를 받아 '''斉村|나리무라일본어'''로 개명하였다. 동시에 종4위하(従四位下)의 관위와 시종(侍従), 美作守|미마사카노카미일본어의 관직을 받았다. 간세이(寛政) 2년(1790년), 아버지 시게무라가 은퇴하자 가독(家督)을 상속받아 센다이 번의 8대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관직은 陸奥守|무쓰노카미일본어와 사코노에쇼쇼( 左近衛少将일본어 )로 변경되었다. 간세이 5년(1793년)에는 관백(関白) 鷹司輔平|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일본어의 딸이자 고카쿠 천황(光格天皇)의 사촌인 信證院|신쇼인일본어(이름은 誠子|세이코일본어)과 결혼했다.
간세이 8년(1796년)은 다테 가문에 불운이 겹친 해였다. 3월 2일, 정실 세이코가 장남 周宗|스미무네일본어(후의 다테 치카무네)를 낳았으나, 산후 후유증으로 4월 16일에 사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21일에는 아버지 시게무라가 에도의 번 저택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리무라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센다이로 돌아오던 중, 시라카와(白河) 부근에서 병을 얻었고, 센다이성(仙台城)에 도착한 직후인 7월 27일(양력 8월 29일)에 23세(만 21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나리무라가 사망했을 때, 장남 스미무네는 갓난아기였고 측실 소생의 차남 다테 나리무네( 斉宗일본어 )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후계 구도가 불안정했기 때문에, 센다이 번에서는 나리무라의 사망 사실을 에도 막부는 물론 번 내부에도 즉시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부쳤다. 이는 차남 나리무네를 나리무라의 공식적인 아들로 인정받아 계승 순위를 확보하고, 어린 장남 스미무네가 말기양자(末期養子)로서 가독을 상속받는 절차를 진행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번에서는 공식적으로 8월 12일에 나리무라가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3일 뒤 막부에 스미무네의 말기양자 상속을 청원하여 승인을 받았다. 나리무라의 法諡|법명일본어은 永慶院殿桂山蘭榮大居士|영경원전계산란영대거사일본어이다.
2. 2. 번주 즉위와 혼인
다테 시게무라의 차남으로, 안영(安永) 3년 12월 5일(1775년 1월 6일)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쇼소인(正操院)이다. 아명은 시키사부로(式三郎), 후에 쇼지로(総次郎)였으며, 처음에는 '''토키무라'''(祝村)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덴메이(天明) 3년(1783년), 형이 요절하면서 후계자로 지명되었고, 아버지의 정실인 칸신인(観心院)의 양자가 되었다.덴메이 7년(1787년) 원복(元服)을 치르고,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나리로부터 이름 한 글자(偏諱, 편휘) '사이(斉)'를 받아 '''나리무라'''(斉村)로 개명했다. 동시에 종사위하(従四位下)의 관위와 시종(侍従), 미마사카노카미 직함을 받았다.
칸세이(寛政) 2년(1790년), 아버지 시게무라가 은퇴하자 가독(家督)을 상속받아 센다이 번의 8대 번주가 되었다. 이때 관직명도 무쓰노카미와 사콘에쇼쇼(左近衛少将)로 변경되었다.
칸세이 5년(1793년)에는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라의 딸이자 고카쿠 천황의 사촌인 신쇼인(信證院, 세이코(誠子))과 혼인했다.
2. 3. 잇따른 불행과 죽음
간세이 8년(1796년)은 센다이 번과 다테 가문에 불행이 연이어 닥친 해였다. 같은 해 3월 2일, 정실 부인 세이코(誠子, 신쇼인)가 장남 다테 스미무네를 낳았으나, 산후조리에 문제가 생겨 4월 16일에 사망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21일에는 아버지 다테 시게무라가 에도의 번 저택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센다이로 돌아오던 중, 나리무라는 시라카와 근처에서 병을 얻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센다이성으로 돌아온 직후인 같은 해 7월 27일(양력 8월 29일)에 23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나리무라가 사망했을 때, 장남 스미무네는 갓난아기였고, 측실 소생의 차남 다테 나리무네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다. 공식적인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번주가 급사하자 번 내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에 센다이 번에서는 나리무라의 사망 사실을 에도 막부는 물론 번 내부에도 당분간 비밀로 부쳤다. 8월 1일에는 막부에 나리무라의 병세 회복이 더디다는 거짓 보고를 올렸고, 8월 12일에야 번 내부에 나리무라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3일 뒤인 8월 15일, 막부에 장남 스미무네를 말기양자로서 가독을 상속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는 아직 태중에 있던 차남 나리무네를 나리무라의 공식적인 아들로 인정받아 계승 순위 2위로 만들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법명(法諡)은 영경원전계산란영대거사(永慶院殿桂山蘭榮大居士)이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다테 시게무라(伊達重村, 1742~1796) - 센다이 번 7대 번주
- '''어머니''': 쇼소인(正操院) - 오사다이노카타(お定の方), 고우코(郷子). 기타야마 미테츠(喜多山美哲)의 딸.
- '''양모''': 칸신인(観心院) - 다테 시게무라의 정실
- '''형제자매'''
- * 장남: 다테 소우사부로(伊達総三郎) - 요절
- * 차남: '''다테 나리무라'''(伊達斉村)
- * 삼남: 다테 센사부로(伊達仙三郎) - 요절
- * 장녀: 요절
- * 차녀: 준히메(循姫), 스케코(順子) - 우와지마 번주 다테 무라토시(伊達村寿) 정실
- * 삼녀: 미츠히메(満姫), 센코(僊子) - 히코네 번 세자 이이 나오토미(井伊直富) 정실
- * 사녀: 이쿠히메(育姫), 톤코(惇子) - 돗토리 번주 이케다 하루미치(池田治道) 정실
- * 오녀: 쇼히메(祥姫), 테이코(禎子) - 쓰치우라 번주 쓰치야 히데나오(土屋英直) 계실
- * 육녀: 호히메(豊姫) - 요절
- * 칠녀: 지히메(慈姫) - 요절
- * 팔녀: 추히메(抽姫) - 요절
- * 구녀: 요절
- * 십녀: 쇼히메(頌姫), 칸코(寛子) - 와쿠야 다테 무라유키(伊達村幸) 정실
- '''정실''': 신쇼인(信證院, 1775?~1796) - 오키히메(興姫), 마코토코(誠子). 관백 다카쓰카사 스케히라(鷹司輔平)의 딸. 고카쿠 천황의 사촌.
- * 장남: 다테 지카무네(伊達周宗, 1796~1812) - 센다이 번 9대 번주
- '''측실''': 신코우인(信光院, 1779~1800) - 신코(信子), 아신(阿信). 기타야마 미아키(喜多山美明)의 딸.
- * 차남: 다테 나리무네(伊達斉宗, 1796~1819) - 센다이 번 10대 번주
4. 평가
무예(武芸)보다는 시문을 좋아하는 교양인이었다. 간세이(寛政) 8년(1796년), 이와마쓰 히스다카(키소지)(岩松壽隆(喜惣治))가 깊은 산중에 묻혀 있던 사쿠나미 온천(현재의 작정보온천·이와마쓰 여관)을 열어 많은 사람들을 돕고자 했을 때, 이를 허락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5. 기타
무예보다는 시문을 좋아하는 교양인이었다. 간세이 8년(1796년), 이와마쓰 히사타카(岩松壽隆)가 깊은 산중에 있던 사쿠나미 온천(현재의 작정보온천) 개발을 요청하자 이를 허락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재임 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신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무라, 村)를 내려주었다(편휘).
인물 | 소속 가문 | 비고 |
---|---|---|
이타테 무라카타 | 가와사키 이타테가 | |
이타테 무라키요 | 와쿠야 이타테가 | |
이타테 무라요시 | 미야토코 이타테가 | |
시라카와 무라오 | 시라카와 유키 씨 지류·마사카 시라카와가 8대 당주 | 1779년 ~ 1821년 |
6. 관련 자료
다테 나리무라의 다이묘 재임 기간은 1790년부터 1796년까지 6년으로 매우 짧아, 다른 센다이 번주들에 비해 관련 자료가 적은 편이다. 재임 중 이름의 한 글자(편휘, 偏諱|헨키일본어)인 '무라(村)'를 받아 개명한 가신들이 일부 확인된다.
- 이타테 무라카타(가와사키 이타테가)
- 이타테 무라키요(와쿠야 이타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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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라카와 무라오(1779년 ~ 1821년, 시라카와 유키 씨 지류 마사카 시라카와 가문 8대 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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